세상이 사탄에 내어준 바 세상은 악한 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따라서 악인이 행복하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착하게 살면 바보취급을 받으며 착한 것이 착한 것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모자란 것처럼 세상은 바라보며 착한 것에 색을 입히고 의미를 퇴색시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사탄에 내어줬고 좋고 착한 것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악하고 어둬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악인이 준동하고 의인은 없는 세상이 되어 정의와 곧음이 상실이 되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비롯 사탄에 내어줬지만 매우 적지만 의인이 살아 있고 이런 의인에 의해 세상은 악의 구렁텅이로 내팽겨치지 않고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끝이 아닙니다. 고난은 먼 여정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온 과정을 마칠때까지 포기하거나 쓰러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가 있는데 그 뜻을 이루기 전에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끝까지 달려가기 의해서는 단단해져야 합니다. 속이 무르고 차있지 않으면 조그만 어려움에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 앉을 수 있지만 속이 꽉 찬 단단함이 준비된 사람은 결코 물러나지 않고 이겨냅니다. 몇 번은 넘어지고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노력을 통해서 극복하는 힘을 길러서 이겨내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처한 환경이 마지막이 아닌 과정이기에 우리는 마지막을 보면서 이겨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큰 고개를 여러번 넘어여 하는데 모든 고개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과정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한두번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준비된 사람들은 노력을 통해서 이겨낼려고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그 턱에서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이 온 몸을 감싸지만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함으로 그리고 선한 길을 달리고 받는 면류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받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7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누가 의인이고 악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키에 올려진 곡식과 쭉정이는 섞어 있을때는구별하기가 어렵지만 키질을 하면 할수록 알곡은 안으로 모이고 쭉정이는 바깥으로 떨어지며 구별되듯이 마지막에 하나님은 세차게 키질을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키질이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듯 의인과 악인을 가려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키질이 바로 고난입니다.
키질중엔 작은 태풍처럼 오기도 하지만 천지가 요동치는 지진처럼 오기도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이러한 조짐이 세상 곳곳에 나타나게 되고 이 키질이 끝나면 알곡은 모아지고 껍질 즉 쭉정이는 바닥으로 떨어져 아궁이로 들어가게 되니 끝까지 참고 승리해야 합니다.
We shall overcome any risks to run the end.
의인의 고난은 잠간이고 악인의 번영도 잠간입니다. 의인의 결국은 영생이고 악인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믿음으로 함께 하는 의인의 길을 고난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지혜를 필요합니다.
혹시 고난과 고통으로 하루 하루의 삶이 힘들어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놓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야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세 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자세입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을까요?
고난과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이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시는 내게 고통을 주지만 나를 뒤돌아보며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불평과 좌절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알곡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고난)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난과 고통의 광야를 통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의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사모하며 오늘도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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