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끔직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싶은 마음이 한없이 깊기 때문입니다. 생령을 불어 넣어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 곁을 떠나 방황하며 가야 할 길을 가지 못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으셨기에 그 아픔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사랑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과 다시 뵙고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기쁨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잔치를 해야 하고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까져가는 생명에 숨을 넣어 주시고 손을 내미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행운을 듬뿍 안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살아 가는 것이 힘드시나요?
하루 하루가 고통의 연속입니까?
앞이 깜깜하여 한 발자욱도 옮기기 어려운 상황인가요?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성찰을 할 수 있는 짬을 주시고 갈 길을 알려 주시는 역활로 주시는 것이기에 인내하고 견디며 자신을 보게 되면 그 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우리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직접 행하신 일들이 그 증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아주 친절하게 몸소 체험을 통해 알려 주시고 승천하신 것을 기억하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들의 대표적인 모습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아주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방자하여 자신이 저지른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의 늪에서 헤메다가 모든 것을 잃고 고통이 온 몸을 감싸고 자신을 향해 찌를때 겨우 나를 찾고 방황의 오만에서 벗어나 회개하며 고향으로 향하는 탕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빈털터리가 되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 한없는 사랑으로 허다한 좌를 덮으시고 자난 과오를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다시 그것도 스스로 되돌아 온 자식을 품은 그 따듯한 마음을 알게 하시려는 싶은 뜻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그 탕자가 우리입니다. 세상끝으로 한없이 뛰처나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한하지만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해서 돌아갈 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죄를 짖지 않고 가는 길을 수없이 듣고 타인의 고백을 텅해서 배우지만 그 길을 그대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참 우매하고 미련한 사람들이지요.
탕자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너무 먼 길을 돌고 돌아 가지말고 주님이 보여 주신 그 모습 그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다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덧없는 수고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소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섯이 주님의 마음이며 우리에게 들려주는 주님의 속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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