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CCM

사도 도마를 생각하며 ...

onchris 2021. 8.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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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된 경로는 일반적으로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로마를 거쳐 북아메리카, 아시아로 유입되었다는 서행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이 소아시아 연안지방을 지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복음을 전파했었고 청교도들이 핍박을 피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그 후에 미국과 호주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1988년부터 사도 도마의 선교여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한국에서 일어나면서 동행론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곧바로 복음이 전파됐다는 학설인데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diaspora) - 흩어진 사람들(행 8:4)’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순종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실천하며 인도에서 순교한 사도 도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선교여행으로 시리아(페르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에 왔고 우리나라(땅끝)까지 와서 예수님과 복음을 전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도마의 한반도 복음 전파설을 뒷받침하는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재가 발견됨에 따라 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도 도마(AD2~72), 그는 어떤 제자이었나?

도마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 도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의심많은 도마(a doubting Thomas)' 일 것입니다. 정경으로 분류된 신약성경에 들어가지 않은 외경 또는 왜경으로 분류된 도마복음, 도마행전 등 도마에 대한 기록들이 배척당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발견이 된 연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은 세상으로 흩어져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도마는 예수 십자가 죽음 이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야 믿겠다고 말할 정도로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나서 '손가락을 옆구리로 넣어봐라'라고 했지만 손가락을 옆구리에 넣지 않았지만 직접  예수를 뵙고 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My Lord and My God 요 20:28)'이라고 위대한 고백을 한 최초의 제자였습니다. 이전에 도마가 예수님에 대하여 가진 지식은 단지 선생으로서의 인식이었으나 이제는 그 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과 확신은 다른 제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없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사도 도마는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먼저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음을 보인 최초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사도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편적인 한 모습만으로 사도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라고 하기보단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려고 하는 체험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고 있는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도마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첫번째로 묻고 보고 만지며 느끼면서 믿어지는 단계에서,

두번째로 체험하고 확실한 신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신앙고백하는 단계가 되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충성스런 자세로 모든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선교하는 단계를 있습니다. 

사도 도마의 전도여정 

사도 도마의 전도활동은 사도 바울보다 먼저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은  AD45~61이지만 사도 도마는  AD30~72까지 입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기간이었던 AD28~30년에 제자로서 활동을 하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나고 바로 전도여행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시작했고 더 오랫동안 전도를 하다가 인도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도마행전에 의하면  먼저 유태인(디아스포라)을 찾아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인근 지역에서 노방 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도마행전의 1-61번까지 19년 (AD30-49)이 전반기 전도 기간인데  전반기 19년의 전도 기간에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에데사, 빠르띠아지역, 북 인도의 탁실라, 아유탁국 그리고 땅끝이라고 생각한 동아시아까지 왔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2년(AD50-51)을 머물며 몸을 추수린 뒤 도마행전의 62-170 번까지 약 22년(AD50-72)이 후반기 전도 기간입니다.  후반기 약 22년 전도 기간에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소코타이 섬과 인도 케랄라의 마라바, 코치에 이어 인도 동남부인 마드라스(첸나이)에서 전도를 하다가 마이라풀(Mailapur)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도마의 전도 길은 사도 바울의 1, 2, 3차 전도 길 및 로마로 가는 길을 합친 것보다 더 긴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후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크게 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유대인 중심의 선교파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명받은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일치하였지만 그 행위에 있어 할례의 형식 등을 따라야 한다는 것과 할례를 하지 않지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 등으로 분쟁이 발생하여 이를 조정하기 위해 AD 50년에 예루살렘공의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행 15:29) 


전반기 전도여정(AD30-49)

에뎃사(Edessa)선교
예수님께서 생애를 끝마치실 시간이 가까워 지면서 자신이 죽은 후에 제자 한 사람을 에뎃사에 보내시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예수님으로부터 이 일을 맡아,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선교파송을 받았던 70인 제자중의 한 사람인 "다데오 앗다이"를 그곳에 파송하였고 이 제자의 사역으로 에뎃사에 복음의 씨앗이 심어지기 시작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첫 번째로 세워진 동교회(the Church of  the East)로 추정이 되며 이 도시에서부터 동방선교의 확장이 이루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도마에 의해서 파송을 받은 제자 앗다이가 에뎃사에 이르렀고 앗다이의 복음 사역의 역사로 치유함을 받은 에뎃사의 왕 압가르는 예수님을 구주로믿고 신하들을 위시하여 시민의 대다수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초대교회의기독교 활동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에뎃사 교회의 창립에 도마가 직 , 간접적으로 관련이 되었다는 고증 문서들이 있으며, 최초의 개종자들 중에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빠르띠아(Parthia) 선교
 예수님 당시의 중동지방의 세력형성에서 고대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패권을 잡았던 나라들로서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샤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로마제국과 빠르띠아 제국의 양대 세력이 당시 중동세력에서서로 대립하는 절대세력으로 등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대 세력간의 완충지대로서 에뎃사를 수도로 하는 오스로헨 같은 작은 나라들이 양대세력을 조정해 주는 역할 을 한 셈이다.  에뎃사는 AD 30년경의 앗다이(Addai)의 선교와 AD32년경의 사도 도마의 선교로 크게 복음화 되었고 후에 기독교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빠르띠아의 영역은 지금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부인도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습니다.  실제로 빠르띠아는 인도 서북 지방에 흐르는 큰 강인 인더스강(Indus River)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Tigris  River)까지이며, 또 페르샤만으로부터 카스피해(Caspian Sea)까지의 넓은 영토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로 전도장소가 인도가 된 사도 도마는 험하고 먼 길인 인도를 가지 않으려고 회피했지만 환상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가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서원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인도 북부지방의 선교

빠르띠아에서 선교이후에 인도의 북부지방에 있는 탁실라에 있는 군다포러스왕의 요청으로 왕궁을 건축하는 목수로 일을 하면서 지배계층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갠지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가야의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국에서 탁실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땅끝이라고 생각한 동아시아의 중국과 가야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회의에 탐석하고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를 하며 2년을 머무르다 다시 후반기 전도여정을 AD52에 바닷길을 이용하여 인도의 서남부지방으로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반기 전도여정(AD52-72)

 사도 도마의 무덤이 있는 산토메성당 (첸나이)

약 40일의 긴 항해끝에 사도 도마가 A.D. 52년에 남인도에 위치한 케랄라의 서해안 항구인 마라바(Marabbar)에 도착하여 전도를 시작했으며 그 후 해안을 따라 남쪽에 위치한 코치에서도 전도를 하였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주민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여 그 지방 일대에 7개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인도 동남부에 있는 마드라스(첸나이)에서 왕과 많은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하다가 전도를 하다가 이교도 원주민들은 다른 종교를 전하는사도 도마를 극히 미워하여 창에 찔려 순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AD72이였습니다.

사도 도마의 헌신적인 전도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 도마파 교회의 시초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수백만 명의 신자가 있는 시리안 정교회는 도마파 교회의 전통을 잇고 2000년 역사의 인도 교회의 초석이 되어습니다. 후반기 전도기간에 전도한 케랄라와 첸나이에 가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기독교의 발자취를 직접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첸나이에는 많은 교회가 있으며 다른 인도지역과 비교하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는데 인도 인구의 3%에 해당하는 3,900만명의 기독교인중 2,000만명이 첸나이가 있는 타밀나두주와 케랄라주 등 남인도에 몰려 있습니다.

세계 3대 성지순례중 하나가 바로 사도 도마에 의해 세워진 인도의 케랄라와 첸나이지역입니다. 특히, 12사도가 제비뽑기에 의해 전도지역이 할당이 되고 전도하다가 순교한 곳에 교회가 세우진 곳은 바티칸(베드로), 스페인 산티아고(야고보) 그리고 첸나이(도마)뿐입니다.

엄밀히 보면 사도 바울에 전파된 유렵의 기독교 역사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인도의 기독교 역사가 바로 사도 도마에 의해 전도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도 우리에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유럽중심으로 기독교가 부흥 발전을 했고 정경으로 선택된 신약서가 대부분 사도 바울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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