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선교사로 부터 시작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복음의 노정입니다. 선교사의 순교나 헌신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 늘어나며 교회가 성장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전형적인 방식에 의한 복음이 들어 온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황해도 소래교회처럼 선교사가 아닌 우리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진 경우가 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드린 이수정은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을 하면서 미국에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매우 독특하고 놀라운 일이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오면서 벌어졌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한국최초 자생교회입니다. 이 시기는 맥트레이. 알렌. 언더우드그리고 아펜젤러가 선교를 위해 들어오기 전입니다.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상륜.서경조 형제에 의해 자생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한국기독교 교회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교회인 것입니다.
형인 서상륜이 복음을 받게 된 것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74년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장사를 하는 의주청년들을 만난 두 선교사들은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다 장사 수입보다 많은 것을 줄 테니 자신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고 마침내 의주청년들은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경말씀을 익히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로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서상륜(徐相崙 1849~1925)은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문수학을 했는데 한문공부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중국말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중국 영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 같은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이응찬이 그를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안내했고 전염병으로 생명의 위급함에 처한 서상륜은 서양병원에서 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에서 로스 선교사의 한글 성서번역사업에 동참하게 되었고 한문 실력이 출중한 그는 로스 선교사의 성서번역 사업에 핵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1866년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사건 이후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지만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 믿고 전도에 가장 중요한 성경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심양에서 한글성경 누가복음이 최초로 발간되었습니다. 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작업은 서상륜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이 성경을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전도의 사명을 갖고 자신이 번역한 복음서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되면서 고려문을 통과하다가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붙잡혔지만 다행히 먼 친척인 김효순의 도움으로 성경 10여 권만을 챙겨가지고 밤에 도주하는 데 성공을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위기를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로 피신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소래교회는 설립 이후 계속 교인이 늘어나 20여명의 교인으로 발전하게 되어 다시 예배당을 개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895년 6월에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건축했고, 그 다음해에 출석교인이 20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다시 8칸을 증축하여 모두 16칸의 기와집으로 만들졌습니다. 그 후에 서상륜은 서울 새문안교회가 세워지면서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소래교회는 동생 서경조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후 서경조는 1901년부터 시작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전도하고 소래교회를 맡아 열심히 섬기며 한국인 최초 목사 7인이 탄생할 때 그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의 최초교인들도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교인들이었고 그 이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조사(전도사)로 세워졌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으며 선교초기 권서인(성경과 전도책자를 팔면서 전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으며 선구자의 삶을 산 서상륜은 1925년 12월 16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일화로는 서울에서 소식을 듣고 소래를 방문한 언더우드선교사가 예배당을 기와집으로 개축하는 데 미국에서 모금하여 오겠다고 하면서 재정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지만 소래교회 성도들이 돈독한 신앙을 바탕으로 소래교회 예배당은 조선인 손으로 분수에 맞게 세우기로 하고 외국인의 도움을 사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힘과 정성을 모아 첫 예배당 건축을 외국인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해결 하였고 이를 본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 온 신식 등불을 밝히도록 남포등을 다섯 개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그 빛이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소래교회는 한국 최초로 자생한 교회답게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곳으로 활용되거나 동학군들의 피신처, 청일전쟁 때에는 도피장소의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렇게 한국기독교 역사에 찬란한 업적을 감당해 오던 소래교회가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어 소래교회를 지난 1988년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1896년 세 번째 16칸으로 증축되었던 소래교회 원형을 복원하여 지금은 기념교회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설립자인 '한국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기념비와 함께 한국기독교 선구자 이수정의 기념비도 2006년 6월 20일 건립되어 있습니다.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투가 주는 한 뼘의 여유 (0) | 2021.09.22 |
---|---|
한국 기독교을 더듬으며 ... (0) | 2021.09.19 |
왜 남자는 빨리 죽을까? (0) | 2021.09.16 |
감정표현을 억압하면 안되는 이유? (0) | 2021.09.09 |
웃기는 만화 (0) | 2021.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