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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을 더듬으며 ...

onchris 2021. 9.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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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선교사의 발걸음 

 귀츨라프(K. F. A. Guetzlaff) 선교사

1832년에 프로이센 프리츠 출신의 귀츨라프(K. F. A. Guetzlaff)이 기독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서해안 고대도 안항에 도착하여  한문성경과 한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조선에 전했으며 한글을 해외에 알린 사람이며 기독교가 한국과 만남의 이정표를 남기었고 그 후 30여년이 지난 1865년 9월 영국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조선에 대한 선교의 꿈을 갖고 1차로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했으며 두 달여 동안을 그곳에 머물며 섬사람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 주고 전도를 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음해인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대동강으로 배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으나 조선 선교를 펼쳐 보기도 전에 죽음을 당하며 한국 기독교의 최초 순교자로 기록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한국에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70년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파송으로 와 있던 로스(John Ross) 조선을 위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1879년에는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에게 세례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세례였습니다. 후에 알게 된 서상륜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합동하여 최초로 한글성경 누가복음을 출판하게 됩니다. 서상륜은 성경을 가지고 조산으로 들어와 선교사가 아닌 조선사람이 세운 최초의 교회 황해도 소래교회를 설립하는 역사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서상륜과 사경조 형제

그리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이어졌고 1882년 8월 일본 수신사인 박영효의 수행원이었던 이수정이 일본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미국에 요청하고 성경번역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전세계 선교사역에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선교사를 요청한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합니다.

로스(John Ross) 선교사와 서상륜과 함께 만든 한글 누가복음

한국 땅에 실질적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 6월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조선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다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 9월 미국 공사관의 동의로 미국 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입국하였는데, 그는 12월의 갑신정변에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구해 줌으로서 왕실과 깊은 교분을 맺게 되고 그 후 고종의 도움을 얻어 제중원(원래의 이름은 광혜원)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1885년 미국 장로교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중원의 업무를 도우면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배재, 이화, 경신, 정신과 같은 기독교 학교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사역은 의료와 교육에 한정되어 하고 전도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습니다. 청일전쟁이 보여준 전통적인 유교의 한계와 동학혁명의 실패  그리고 발전된 서양문명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제국은 갑오경장을 통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새롭게 만들 세력으로 자연스럽게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가 금지되었지만 합법적으로 허용된 의료와 교육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받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도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근대적인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쇄국으로 시대에 떨어져버린 대한제국은 개방을 통해서 차츰 서양문명을 받아드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중심에 있던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이 되면서 어려운 상황과 사회적인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통해 영적인 각성을 요구하는 회개운동이 불 일듯 일어나 1903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에 절정을 이룬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교회로부터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부흥운동은 철저한 회개와 새로운 삶에 대한 변화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기독교는 사람들의 가슴에 뿌리내리게 되었고 더불어 신앙의 힘으로 나라를 구해 보려는 애국정신도 갖게 된 것입니다.

2. 치욕스런 주권찬탈후 기독교의 리더쉽

기독교인과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근대적 민족운동과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가  안타깝게도 1910년 일본의 주권찬탈에 의해 한국 기독교의 상황을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일본이 통제하기 어려운 반일적인 단체로 보았으며 또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탄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단통치 기간에는 각종 교육령을 만들어서 미션 스쿨을 총독부의 통제 아래 두었고, 포교 규칙을 제정해 교회의 집회와 설립도 허가를 받도록 강요했습니다. 주권찬탈이 된 후 자주 외교권을 빼앗겨 미국 영국 등에서 온 선교사와 함께 한 교회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역활을 하면서  1918년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국내에 알리고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대표하는 33인중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었으며 기독교 조직을 동원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던 것입니다. 3.1절 독립 선언서의 자주독립과 비폭력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이런 소식을 선교사들을 통하여 3·1운동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일본이 강제와 억압으로 자행했던 무단통치의 식민지 정책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리며 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석호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3·1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두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하나는 보다 영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신비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자본 육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 절제운동을 통한 도덕의 재무장, 농촌계몽운동과 같은 점진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습니다. 그러고 동시에 한국 기독교는 상해임시정부와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해외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계해서 그들을 돕고, 외국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활도 하였습니다.

*️⃣ 공산주의 사상의 위협속의 기독교

3.1운동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하지 못 해 좌절된 사람들은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을 하던 중  1917년 볼셉키혁명으로 공산당이 등장하고 레닌이 억압받은 민중과 약소국의 자주독립을 지원한다는 공산당의 사상이 유입되어 급속도로 퍼져 나가며 사람들이 빠져 들었고 심지어 교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하는 일로 발생하면서 '공산주의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당시 교회의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자주독립 그리고 억압받는 민중의 구원 등은 매우 신선했고 그 당시 요구되는 현안이었기에 관심을 끌면서 교회는 이 사상의 파급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민족교회로서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가 아니고 우리 민족 자체에서 온 위기요,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 기독교가 겨냥했던 일반 대중과 하류층에 파고드는 무서운 사상적 적대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파고들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대신 침투하여 그 사상을 불어넣고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함으로써 기독교 전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으며, 또한 무서운 적대 세력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로 정면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아야 했기에 이때부터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반공이 하나의 큰 흐름이 된 것입니다.

*️⃣ 신사참배에 굴복한 부끄러운 기독교의 민낮

이와 더블어 3.1운동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 그리고 민족말살통치가 되면서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의해 일제에 부역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기독교가 성장하는 과정중에 변절이 되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한국 기독교의 역사로 남아 있지만 더욱 더 문제인 것은 그러한 과거에 대한 지독한 반성없이 형식적인 뉘우침으로 순교로 세운 우리의  교회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안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교회와 목회자, 신자는 갖은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고문과 징역에 시달리며 신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일사각오' 로 저항하며 귀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순교의 피가 뿌려지면서 그 희생을 토대로 더욱 더 믿음을  지키며 독립운동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8.15 광복되기까지 지켰습니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변질과 부일 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세속의 권력에 영합하고 추종한 행위로 기독교인으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악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3. 광복 이후의 기독교

광복은 한국 사회에 큰 기쁨이었지만 광복후 북한의 기독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시작과 번성이 평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회와 지도자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남한에 비하여 우세했었지만 공산주의로 학습된 소련과 마찰을 빚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승만이 장악한 대한민국은 권력욕에 사로 잡힌  그의 배신으로 일제청산을 하지 못 하고 그들을 중용했으며 역시 일제에 부역한 친일 교회와 지도자들과 함께 협력하며 민족의 정통성과 정의를 세우지 못 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친일 청산없이 친일 매국노들에게 면죄부와 부귀영화를 주며 둑립운동으로 목숨을 건 투쟁을 해 온 선열들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했습니다.

광복후 한국 기독교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는데 김구, 김규식 등 주요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1948년 제헌국회는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정부와 더불어 반공전선을 강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는 반공과 친미를 전면에 내세우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내세운 반공이방향과 일피하게 되어 적극저인 친정부성향을 드러내며 독재와 야합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은 1960년대의 민족복음화 운동, 1970년대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 엑스폴로 74 등의 대형집회를 통해서 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졌습니다. 동시에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박정희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하였고 산업화의 부작용과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내에 내재해있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진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한기협, NCCK)는 1988년 한국 교회의 반공 입장이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교회가 반공을 강조한 것은 회개해야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하여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전체적인 목소리가 아니며, 외국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현실을 무시한 일부의 의견일 뿐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이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1989년에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항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만들었고, 한국기독교의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해오고 있습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계인데 이것이 반공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과 북한을 함께 묶여서 대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북한은 우리와 함께 해야 할 한민족인 것을  망각해면 안 됩니다. 외부의 간섭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과 민족의 하나를 위해 기도하며 길을 찾는 노력에는 다른 이념적 이슈가 끼여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19세기 말에 들어온 기독교는 격변기를 함께 하며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건국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했고, 그 결과 한국의 중요 종교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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