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근대 역사에서 가슴에 가장 잘 새겨놓고 기억을 해야 일이 저는 개인적으로 3.1운동입니다. 쇄국정책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역사를 바로 잡아 제국들의 침략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19세기말은 가장 급변했던 시대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국호를 광무로 하고 왕에서 황제로 격상시켜 중국 청의 간섭으로 부터 독립을 대외에 선포하고 사대주의 사상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습니다. 개혁을통하여 자주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소련과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대한제국을 노리며 지배할 기회을 엿보며 각축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 하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1910에는 주권을 찬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며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의 대한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광복후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일본의 압제속에 자주독립을 꿈꾸던기미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했습니다. 33인중 기독교인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만이 민족대표로 되어 있어 이상할 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 남은 조직이 종교 단체와 학교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종교계 중 가장 많은 16명이 포함됐다며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표현합니다. 틀린 말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3.1만세 운동이 조직으로 움직였고 열심으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주독립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으며 3.1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가 이후에 변절해서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는 사실을.. 참 부끄러운 우리 기독교의 자화상입니다. 신사참배가 대표적인 것이며 이와 더블어 황거요배, 동방요배, 부일협력, 헌금으로 침략 전쟁 군자금 지원 심지어 교회종까지 헌납하는 등 차마 입에 올리기 조차 민망한 짓을 자행하며 반성과 회개에 앞서 어쩔 수 없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돛표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여기 민족대표 33인중 3명의 변절자가 있습니다. 천도교인 최린, 기독교인 정춘수와 박희도입니다. 읻ㄹ의 친일행각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감리교 정춘수목사
대표적인 인물이 감리교회 소속 정춘수목사입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으로 감리교 대표로 참석했지만 뚜렷한 가치관이 없는 인물로 그 후에 변절하여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입니다. 감리교단의 핵심인물이 된 후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에 올랐으며 1925년이승만이 주도한 흥업구락부에 가입해서 활동하다 1938년 일제에 의해 붙잡혔 일제의 회유에 굴복 전향서에 서명을 하고 국방헌금 2400원을 내고 풀려나면서 일제에 부역하는 사람으로 변절이 되고 1939년 감리교 감독이 된 후 적극적인 친일행보를 했습니다.
1938년 5월 8일 '내선(內鮮)기독교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총후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연합회의 부위원장으로 또기독교조선감리회,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등의 대표자로 활동하면서 종교를 통한 일제의 황민화 운동에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또 태평양전쟁 개전을 전후해서는 전시동원단체(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교단 이사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의 간부를 맡아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특히 1944년에는 조선종교전시보국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신사참배 및 신궁 조영 근로봉사와 비행기 헌납 등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좌담회나 친일잡지 기고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 선전 등 총독정치의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였습니다.
일제 패망 1년 전인 1944년 3월, 정춘수는 일제의 군용 비행기(감리교단호) 헌납을 위해 전국의 39개 예배당을 폐쇄하고 교회 소유의 부동산을 매각하려 했으며 심지어 친일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제명시키거나 출교 혹은 휴·퇴직 처분을 통해 교회에서 강제로 쫓아내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2. 감리교 박희도전도사: 친일잡지 창간, 운영...학병권유 연설
박희도는 일제 말기 대표적 친일잡지인 <동양지광>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던 자입니다. 감리교 전도사 출신으로 YMCA 간사로 활동하다가 3·1의거에 참가한 그는 당시 33인 중 최연소자(30세)였는데 미결구류 360일에 통산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중앙유치원 운영과 더불어 좌파 청년들과 함께 <신생활>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하면서 종래의 비타협·급진적 언론활동을 견지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1922년 말 <신생활> 필화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출옥 후 정춘수와 ‘신간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연정회’ 활동을 통해 먼저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린 등과 교류하면서 점차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1934년엔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 합동으로 조직된 친일단체인 ‘시중회’에 발기인과 회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로 들어선 것은 중일전쟁 발발 2년 뒤 1939년 1월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습니다. <동양지광>은 총독부의 비호 아래 친일논설 게재는 물론, 최린 등 유명 친일인사들을 동원해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협력 목적으로 좌담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동양지광사 주최로 시국좌담회를 주최하기도 하고 전속극단인 ‘협동예술좌’를 통해 신극(新劇) 황민화의 기수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자신이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 '진심을 헌납하라' 등의 친일성이 농후한 글을 <동양지광>에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강원도에서 학병권유 연설을 하였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협력 단체에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얼마 뒤 불기소로 풀려났으며, 1952년 9월 한국전쟁 기간 중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33인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변절자가 없었다면 우리 항일투쟁사가 참으로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바로 알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3.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은 전국 교회에 설치된 종을 일제에 헌납하자고 교회에 독촉했고 기독교 신문은 자발적인 헌납을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설을 싣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헌납된 교회 종만 무려 1,540개였습니다. 교회는 종뿐만 아니라 교인들을 동원해 무기를 제작할 수 있도록 철문이며, 놋그릇 등을 모아 일제에 자진해서 갖다 바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독교는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해 1942년 2월 10일 ‘전투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자금으로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으며 당시 기독교의 헌금과 성금으로 제작된 전투기의 이름이 '조선장로호'와 '감리교단호' 였습니다.
기독교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해 '전승 축하회 604회', '무운장구 기도회 9053회', '위문 181회', '시국강연 1300여 회' 등을 열어 일제가 요구하는 친일 매국노짓을 일삼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봅눈도 망각하고 우상을 섬기는 치욕의 흑역사를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광복후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반공의 프레임으로 친일행적을 숨기며 기득권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연착륙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보수 기독교는 대부분 일제시대에 친일파로 살았던 매국노였고 이들의 유일한 논리는 반공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뜻과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용공분자)'로 몰았습니다. 이들은 전면에는 반공을 내세우지만 실제 그 속은 아니였던 것입니다. 친일청산하지 못 한 역사의 후퇴는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고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며 지금도 억지주장으로 이분화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서북청년회'입니다. 이들은 북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어려워 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적인 보수교회인 영락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조직됐습니다. 이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제주 4.3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별동대로 활동하며 백색테러를 자행했습니다. 보수 기독교으로 유명합니다. 보수 기족교의 핵심인물인 한경직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던 인물이며 군사 독재에 협력하고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입니다.
기독교가 3.1운동을 이끈 주역임은 분명하지만 일부 목사와 장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겨야 하는 믿음의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입니다. 3.1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한국 교회가 외쳐야 할 것은 처절한 회개의 기도와 반성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3. 기독교인 김활란
김활란이라고 하면 '친일 여성의 대모' 라고 불리는 친일 매국노입니다. 김활란은 대한민국 여성 1호 박사이며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신여성으로 존경과 부러움을 받던 그녀의 인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뀝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을 전쟁 기지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김활란은 조선총독부의 훌륭한 친위대였습니다. 김활란은 일제시대의 보여줬던 모든 행동이 친일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함께 진행한 친일단체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활란이고 여성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친일 어용단체에는 빠짐없이 발기인,이사,의원 등의 직함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중일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바치는 '애국금차회',조선여성을 계몽하여 황국 여성으로 천황께 충성을 외쳣던 '조선임전보국단',' 황군과 한몸으로 전쟁을 지원하자고 독려하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등 수없이 많은 단체에서 김활란은 맹활약했습니다. 김활란은 단순히 친일조직에 명목상 회원으로 등재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총독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조선 여성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며, 그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외치고 다녔던 일본의 앞잡이였습니다.
김활란은 1942년 12월 신시대 잡지에 태평양전쟁에 미친 일본이 동원한 '징병제'를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라 찬양하며, 반도 여성(조선여성)에게 내려진 이 보은을 허둥지둥 감격만 하지 말고, 선뜻 남편과 자식을 전장에 바치라고 충고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으로 내 남편과 아들은 내 것이 아닌 일본 천황폐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며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 황송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김활란에게 친일은 부역이 아닌 황국신민으로서의 성은이었습니다. 이런 그녀는 '친일파'가 아니라 그냥 '뼈속까지 일본인' 이었습니다.
'성공과 출세'을 위해 친미와 친일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면서 변신했던 김활란, 그녀는 여느 친일매국노와 똑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던 인물이며 1939년 조선총독부는 외국인 기독교선교사들이 자유주의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이들을 추방하여 6대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가 추방당하자 그녀는 곧 바로 이화여전 7대 교장이 됩니다.
중일전쟁 이후 김활란이 조선총독부의 각종 강연회와 행사, 조선인 대표로 끈끈하게 일본인들과 함께 손을 잡은 성과가 드러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친일의 아이콘이었던 김활란은
"저 흑노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 …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의 천지로부터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강연 중) 라고 미국과 영국을 격퇴하자고 주장했던 김활란이 해방되자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에 임명됐었고, 이승만 정권에서는 '한미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친미에서 친일, 다시 친미로 변신하며 살았던 그녀의 인생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유지하며 살았던 인생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변신의 귀재는 어느 친일파에서나 볼 수 있는 당연한 성공과 출세의 정석이었습니다.
그녀의 충격적인 활동중에 하나가 '학생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1938년 김활란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유치원)의 400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애국자녀단'을 조직합니다. '애국자녀단'은 말 그대로 일본과 천황에 충성을 다하고 전쟁을 후원하고 지원하기 위해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한 친일조직입니다.
1939년 조선총독부의 명령도 아니었는데 김활란은 먼저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섰고, 1941년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합니다. 교장이 창씨개명을 하니 당연히 학생과 교사들도 앞다퉈 일본이름으로 바꿨습니다.
1943년 태평양전쟁 막바지 이화여전은 전시비상조치로 폐교당하고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됩니다. 학교가 폐교당하는 상황을 김활란은 오히려 특전이라고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군대에 가는 일이 여성으로 좌절됐지만, 전쟁은 일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변신하는 것이 '황국 여성'으로 다시 없는 특전이라 감격했던 그녀는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동분서주하기도 했지만 1944년 이화여전(여자특별연성소)은 150명의 학생을 모집하지만, 40명만 지원하고 그나마 있던 재학생들도 대다수 학교를 떠납니다. 김활란을 따랐던 후배와 학생들조차 그녀가 일제의 광기 어린 전쟁에 적극 동조하자 그녀를 외면한 것입니다.
죽어서도 비난을 받을 것을 알았는지 결혼도 하지 않아 후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 선경지명이 있었던 김활란의 동상은 이화인의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4.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자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은 배교자들
기독교 교리의 근간인 성경에 나온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 모인 전국 27개 노회 목사 86명과 장로 85명은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당시 월리엄 블레어를 비롯한 선교사 20명이 안된다며 불법이라고 외쳤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습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목사와 장로들은 곧장 평양신사를 찾아 허리를 숙여 절을 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만 신사참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일왕을 섬기는 ‘황국신민 선서’를 제창하고, 일왕을 칭송하는 기미가요를 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배 시간이라도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일왕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했습니다. 교회마다 이동식 신사인 '가미다나'가 설치됐고 교인들은 일본 귀신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에서 일본 스님이 일본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집례하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신도침례'를 받았습니다. '신도침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 고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어집니다. 조선의 교회는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라고 하는 문구에 서명해서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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