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영국선교사이신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의 순교를 통해 복음이 전달되고 이 후에 입국한 선교사에 의해 교육과 의료에 대한 허가를 받아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전도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정세속에 대한제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독교가 부상하며 점점 믿는 신도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선고사를 통해 선진 문명과 기술이 전달이 되고 국제정세에 대한 소식을 전해지면서 자주독립과 민족주의에 대한 소망을 키우던 중 1917년 미국 월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그 입장이 더욱 더 선명해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일제에 거세게 저항하게 됩니다. 이때 주도적으로 기독교인이 참여하고 이로 인해 핍박과 순교가 이어지며 힌국 기독교가 유지되어온 밑걸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교하기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순교는 교회의 한 톨의 밀알과 같은 존재로 이 땅에 떨어져 천배 만배의 수확을 거두게 한 것입니다.
1889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로 누나 메리와 입국했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도착한 선교지 부산에서 쳔연두에 감염되어 1890년 4월 순교한 조셉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그의 죽음으로 호주에서 한국에 대한 선교의 눈을 드게 했으며, 1885년 입국해서 광혜원을 비롯하여 질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다 이질로 순교한 의사이자 미국장로회 최초로 임명된 선교사였던 존 헤런(John W. Heron),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해서 한국 최초 자생교회인 소래교회에서 목회하며 한국사람처럼 한국식으로 복음을 전하다 일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스스로 생명을 거둔 윌리암 존 매켄지로 인해 캐나다로부터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동기가 되었고, 그리고 심혈을 기울이며 청일전쟁으로 인해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료하다 본인도 감염되어 세상을 떠난 윌리암 제임스 홀(Willian J. Hall) 그리고 부인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과 대를 이은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한국결핵협회를 만들고 크리스마스씰을 도입해 결핵퇴치에 앞장 선 선교사 가족이었으며 순교적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며 평양, 서울, 소래, 부산에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경번역을 위해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던중 어청도 앞바다에서 순교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8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함께 미국 북감리회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서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기독교서회의 전신 예수셩교셔회를 설립하고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과 연합운동에 앞장서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을 위해 열심을 다 했으며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도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하다 아버지의 가묘옆에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미국 남감리회 파송으로 1907년 교사로 교육사역을 시작했던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선교사는 24살의 여자선교사로 급성 맹장염이라는 간단한 질환을 치료하지 못해 사역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순교했으며와 1918년 미국 감리회 파송으로 한국에 들어왔던 파울린 랜들(Pauline G. Randle)선교사도역시사역중 급성 맹장염에 의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천연두, 뇌염 그리고 맹장염과 같은 질환으로 사역도중 별세한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이 목숨을 잃는경우가 빈번했다고합니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계급타파와 남녀차별을 없애는 일로 헌신했던 찰스 알렌 클라크(Charles Allen Clark,곽안련)는 자녀를 먼저 떠나 보낸 슬픔을 당했고 1926년에 온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과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은 고아들의 친구라고 불릴정도로 8년간 한국사역을 마친 후 사역하다가 다시 예전 사역지인 아프리카 케냐로 돌아간 후 1953년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돕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마리 위더슨은 투병중에도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5개월만에 위암으로 사망한 마리 위더슨은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라고 유언을 남기고 순교를 하셨습니다.
외국인이지만 한국과 한국인을 너무도 사랑하고 목숨까지 내놓으며 주님의 명령에 충실한 선교사들의 삶을 한국인들은 이들이 보여준 신앙을 그대로 본받아 핍박속에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따른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로 있었습니다.
복음전도 때문에 만주 우장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다 외국인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봉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얼마 후 옥사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인 백홍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경의 고문으로 인해 순교한 진덕기목사와 옥고를 치룬 믿음의 선배들, 제암리교회를 비롯하여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순교한 전국의 수많은 교우들,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6.25전쟁중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손양원 목사, 문준경전도사를 비롯한 수많은 남북한의 순교자들은 이 땅의 짧은 역사가 순교의 역사였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는 한국교회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는 고귀한 순교의 정신을 본받아서 잃은 신뢰를 회복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활이라는 본분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순교자들이 생명을 내놓으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위해 열심을 다 한 것입니다.
둘째, 한국의 순교자들의 순교 그 자체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들이 순교하기까지 보여주었던 순교적 삶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항상 순교적 삶을 살다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한국의 개신교 순교자들은 한국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온갖 고문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당당하게 맞서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보여준 신앙은 그래서 너무도 값진 것입니다.
셋째, 초기 순교자들이 한국교회 신앙의 롤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는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이 후 국내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롤 모델이 되었고,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신앙의 롤 모델이 되었다. 제임스 홀의 순교는 소래교회에서 활동하던 매켄지에게 너무도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폴리갑의 순교는 주기철 목사에게 롤 모델이었고,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손양원 목사에게 롤 모델이 되었다.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를 위해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지 않고 신앙의 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이들 순교자들은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유산이고 이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넷째, 한국교회 순교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반도 북녘, 북한에서는 너무도 많은 지하 교인들이 신앙때문에 순교를 하며 핍박과 고통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북한을 위해 우리는 기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통일은 시대적 필수적인 것이며 북한과 아시아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탄압하는 것으로 남한에서는 세속화를 통해 신앙을 버리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박해를 받는 신앙인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며 무장해야 하고 고통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이며 한국교회는 다시 순교적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흩어진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토마스, 주기철, 손양원이 전해준 순교적 신앙을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사역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일곱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이 성령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폴리갑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토마스가 1859년 웨일즈 부흥운동을 통해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주기철목사나 손양원목사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순교적 삶과 순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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