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맞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십일조가 당연한 것이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쓸데없는 논쟁거리로 치부하고 무시할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나 교회의 운영자의 입장에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 죄 사함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지극히 정상이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당연한 것이 논쟁이 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지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럼 왜 문제가 되는지 알아 보고자 합니다.
십일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시기 전 구약에서 하나님과 선민인 이스레엘 백성간에 맺은 여러가지 언약중 하나입니다. 십일조는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기업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해서 그리고 구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 2가지 목적으로 십일조를 말씀하셨고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율법시대와 말씀의 시대로 구분되어 지는 것의 기준이 예수님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믿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상징적인 역사가 예수님이 돌아가실때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던 성전의 휘막이 둘로 갈라지며 찢어지며 보여 주셨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으로 구약시대, 율법시대에 죄로 인해 성전에 가서 흠없는 동물로 제사을 드리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도록 하신 것을 폐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행했던 제사나 절기 그리고 십일조를 지킬 이유가 없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신 것을 외면 아니 심지어 부정한다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십일조의 2가지 목적중 레위지파의 생계로 드린 십일조는 성전이 없는 관계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지파도 제사장의 역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없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적인 구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매 3년마다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필요한 사역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이 목적으로 하는 십일조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지만 구제헌금과 같은 역활로 한정되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든지 구제헌금이라고 바꿔서 사용하든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능과 목적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레위지파나 제사장은 없지만 목사가 그 제사장과 같은 역활을 하니까 십일조를 교회에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자기 합리적 논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과 말씀을 가르치는 역활이지 제사장의 역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소명을 갖고 하는 천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물론, 목사의 직분에 대한 사례(월급)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사례와 십일조하고 연관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재정은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금(연보)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맞습니다. 당연히 폐지된 구약의 율법중 오직 십일조만 덩그러니 떼와서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십일조가 예수님이 부활승천후 사도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부터 3세기까진 십입조를 가르치지도 걷지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건축과 성직자들을 위한 교회의 재정적인 필요성이 인식되면서 십일조를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의 원초적인 목적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 부활시킨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잘못된 목적과 의도로 거론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이를 합리화시켜도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일조를 법제화시키는 일이 6세기 후반에 공의회를 통해 의무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적인 십일조는 중세시대를 거치며 권력과 종교가 결합하여 일종의 세금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지속되어 오면서 성경적 목적과 의도를 벗어난 십일조의 강조나 의무화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훼손시켰으며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조장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종교개혁후 유럽에서는 18, 19세기에 십일조를 폐지하였으며 십일조 의무론의 원조인 로마 카톨릭교회 조차 이미 십일조 의무론을 폐기한 지 오래되었고 동방교회는 십일조 의무화를 아예 생각하지도 안했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듯 한국교회는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강조하고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십일조 의무론을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는 역사의 후퇴를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일조 의무론은 성경적 근거도 대단히 희박하며 만약에 한다면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의 목적(교회, 이웃, 사회)에 맞게 교회 재정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의 절반 이상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실천을 해야 만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물질을 하나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데 아낌없이 사용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가난해질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2천년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아낌없이 사랑하고 나누는 가난한 교회가 가장 부요하고 풍성한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였음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네소타의 한 미국 교회는 헌금의 절반을 외부 사역과 지역사회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50%로 교회의 재정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헌금의 목적에 맞게 충실하게 나눔과 구제를 실천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교회는 재정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으며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헌금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말씀하신 언약이 미국의 미네소타의 교회에서 생생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일조를 억지로 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거듭나는데 촛점을 맞추며 신앙생활을 권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믿음이 굳건히 서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고 나눔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또 자발적으로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연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헌금(연보)를 하게 되면 이는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죽어가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실천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교회성장이 교회의 최우선이라는 목표부터 내려 놓아야 합니다. 교회의 신도를 늘리는 데 온 정신을 쏟는 팽창적인 목표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교회건축을 통해 대형화하려는 마음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교회, 목회자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솔선수범해서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자기 사랑의 최소화' 와 이웃 사랑의 극대화'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 의미없는 십일조 논쟁은 원천적으로 사라제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삶, 이웃 사랑을 통해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자발적인 감사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감격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스스로 물질을 바쳐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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