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년간 닫혀있던 한국방문
2020년에 발병한 코로나로 인해 매년 한번씩 한국을 방문하여 엄마를 뵈었던 것을 근 3년간 하지 못 했습니다. 영상통화로만 안부인사를 드릴수 밖에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이가 드시면서 기력이 약해지고 치매가 조금씩 진행이 되어 말도 못 하실때도 있고기억을 하지 못 하는 경우도 생기곤 할 때마다 코로나로 인한 현실이 참 속상하게 만듭니다. 한번 아플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리는 일로 인해 속이 타들어가고 언제나 가서 얼굴을 뵐까 마음을 조리던 중 작년말부터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 방문에 필요한 조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방문비자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가 있기전에는 무비자 방문이었는 데 이 지독한 호흡기 질환은 이것마저 바꿔놔서 방문비자없이는 방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문비자를 받는 과정이 녹록하지 얺아서 많은 서류가 필요하고 한국에 직계가족이 있어야 하고 직계가족인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필요한데 우리 가족은 호주시민권을 취득할 때 모두 영어식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이중으로 증명을 해야 했습니다. 예전의 한극이름과 지금의 이름이 동일인인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증명서류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또한 한국국적을 상실한 상태가 아니면 국적상실 신청도 함께 해야 했으며 모든 서류를 준비하고 영사관에 방문하여 서류에 대한 1차 확인후 이상이 없으면 비자를 신청하면 결과를 받기까지 또 2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자를 신청하고 심사기간동안 문제가 발생하면 미비한 서류를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기간이 늘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방문비자가 나와야 비행기표를 예약할 수 있기 때문에 비행기티켓를 사는 것을 진행할 수 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가 완료되어애 다름 단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이 문제가 발생하면 그 만큼 늦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입국하는 조간이 비자이외에 입국 48시간전의 PCR test 음성결과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직항항공기를 이용해야 충족시킬 수 있기에 직항이 있는 시드니에서 머물러야 했으며 역시 코로나 테스트도 시드니에서 받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가기 전 푀소한 4일의 시간을 비언하야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시드니에 있는 딸집에 머물면서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않고 목요일 저녁에 타는 비행기에 맞춰 수요일 아침에 PCR test 예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테스트 결과가 양성이 되면 비행기에 탑승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시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아침 저희 부부는 긴장한 마름으로 테스트장소에 갔고 그곳엔 이미 우리가 예약한 내용이 등록이 되어 확인 후 바로 테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20년에 발병된 후 저는 처음으로 하는 테스트였습니다. Drive through이라 차에 앉아서 편안하게 테스츠를 박았던 기억입니다. 테스트결과를 기다리는데 오후 3시가 되어도 연락이 안 와서 마음이 초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확인차 전화를 해야 되나 하던 중 5시가 지나서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는데 천만 다행으로 둘 모두 음성이 나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는 조건이 모두 충족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한국에 가져갈 짐을 챙기며내일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3. 비행기에 오르다.
방문이 가능해졌지만 아직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좌석이 여유가 있어 4명이 앉는 곳에 2명만 앉게 되어 편안한 상태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만에 가는 한국방문에, 어머니를 3년만에 만날 수 있다는 셀레임으로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오직 비행정보만 보면서 갔습니다. 한국에 가게 되면 자가격리를 7일간(다행이 10일에서 단축됨)해야 하고 지속적인 관찰과 상태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폰이 필요합니다. 인터넷과 한국폰을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미리 신청을 했으며 한국에 도착하고 자가 격리장소에 도착하면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예약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긴 여정과 함께 만만치 않은 비용도 감수해야 하는 여행이지만 어머니를 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가슴 벅찬 마음으로 한국을 향합니다.
4. 한국에 도착
입국자들에 대한 매우 타이트한 검색과 검역이 시행되고 있음을 내리면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호주국적자로 입국하는 것이고 외국인은 자가격리 숙소를 자비로 머물려야 하지만 자신의 친부모가 있는 경우에는 자택격리가 허용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신분의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미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꾼 우리는 이를 또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여 검역사무실애서 별도의 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비자를 받으면서 스캔해 놨던 서류를 확인하여 자가격리를 부모의 집에서 하는 것을 허용받고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특별관리 대상인 관계로 질병관리청이 마련한 택시나 공항버스로 숙소가 있는 지역의 보건소로 가서 1차 PCR test를 받고 보건소에서 지정한 차량으로 자가 격리장소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한참을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버스를 타고 도착한 보건소는 테스트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가검진킷트로 테스트후 양성이 나와서 2차 PCR test를 받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인 것을 알고 식겁한 기억이 또렷합니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대기장소는 좁고 추웠으며 사람들로 북적이어서 우리는 감염을 피하기 위해 추워도 되도록 멀리 떨어지기 위해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또한 검진을 받기 위해선 문진표 작성을 해야 하지만 아직 호주폰인데다가 익숙하지 않아 여러번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온라인의 불통으로 20여분을 추위속에 떨며 다시 하길 반복 해야 했으며 어떻게 어떻게 하여 겨우 테스트를 마치고 지정된 밴에 올라 장모님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훌쩍 지난 뒤였습니다. 새벽에 도착하여 장장 6시간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5. 자가격리 7일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전체적으로 감염자가 폭주하는 시작점이었던 때여서 그런지 정확한 정보를 보건소로부터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가 항상 통화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업무의 폭주로 받아야 하는 자가검진킷트도 이틀이 지난 뒤 받았으며 매일 오전 오후에 2번씩 보고하는 건강상태와 체온도 임의적으로 제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오기 전에 들었던 선진시스템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기전에 받았던 호주에서 테스트가 생각나게 했던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1차 테스트 결과 우리 모두 음성이 나왔습니다. 자가격리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격리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장모님 댁에 여기 저기 손봐야 하는 곳이 있어 1주일의 자가 격리기간을 매우 뜻깊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았었습니다. 오기전부터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은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3일간 어머니를 임시 퇴원조치를 해서 함께 보낼려고 마음을 먹고 왔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폭주하는 감염자로 외부 환경이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기에 마음이 초초했습니다. 작년 12월에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기신 어머니는 그 휴유증으로 코삽관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고 부정맥으로 인한 산소포화도가 떨어져 산소공급용 호스를 항상 달고 있어야 하는 상태인 관계로 병원을 나와 움직이는 것이 어려운 상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생전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만남이라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병원에 한번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긍정적인 검토를 했었지만 갑작스런 병원내에서 감염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이것마저 쉽지 않은 상태로 가는 것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달래며 자가격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가격리 5일째 되는 날 보건소 담당직원의 연락으로 자가격리 해제전 2차 PCR test을 오늘이나 내일받으라는 연락을 받고 바로 자가격리앱을 통해 외출신청을 하고 일찍 검사받기 위해 서둘러 관악보건소에서 만든 낙성대선별진료소로 가 번호표를 뽑고 문진표 작성을 하고 기다렸는데 점심시간과 맞물러 한참을 외부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건소처럼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다른 사람으로 부터 감염이 되는 위험이 훨씬 덜한 공원에 위치해 있어 한결 나은 환경이였습니다. 5일째 되는 날에 한 이유는 감염자의 폭주로 테스트결과가 하루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와 이로 인해 결과가 나오지 안흥면 7일이 지나도 자가격리가 해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가 결과를 받은 것은 6일째 늦은 오후였습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바대로 진행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12시가 되길 기자렸다가 12시가 지난 늦은 밤에 우리 부부는 기념으로 한적한 거리를 산책하고 들어 왔었습니다. 드디어 자고 나면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하니 너무도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동안 감염자는 7만을 넘고 10만이 넘더니 어느새 15만을 훌쩍 넘겨 심각한 상태로 모두들 촉각을 곤두 세우며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퍼지기 시작한 일일 감욤자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금요일에 해제되고 병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측의 반응이 탐탁하지 않아 여간 신경이 쓰지 않을 수 없은 상태였습니다.
6. 3주의 시간과 경비를 들여 와서 고작 5분간 만남
연락을 기다리다 여의치 않아 식구들과 경동시장으로 고추가루를 사기 위해 이동하던중 동생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와사 지금 병원으로 올 수 있느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주중에는 힘들고 주말에는 짧게 나마 비대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뵙기 위해 온 한국방문이기에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바로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안으로는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병원문 밖에서 어머니가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어머니가 휠체어를 타시고 내려오셨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해 보이셨고 우리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시는데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보시는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유리문으로 막힌 상태에서 거리상 5미터이상 떨어진 상태이여서 너무나 아쉽지만 직접 얼굴을 뵙게 되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 였습니다. 방문을 위해 비자준비와 3번에 걸친 PCR test와 7일간의 자가격리끝에 단지 허락된 5분의 비대면 만남뿐이라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직접 손도 잡지 못 한채 돌아서야 하는 현실이 받아 들이기 너므 힘들었습니다. 다만 건강해 보이시는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 어머니의 감염
이제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3일간 원래 계획한대로 하고자 했지만 병원측은 코삽관한 상태와 휴대용 산소공급기를 차고 외부로 나가는 것은 감염의 위험이 높고 보살피는 것이 어렵다고 설명과 병원에서 감염자 발생 그리고 동생의 만류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우면서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건강에 위해서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지척에 계시지만 호주에 하던 영상통화로 인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현실을 직접 경험하면서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귀한것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를 뵙고 3일 지난 화요일에 동생으로 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고작 5분의 만남이후에 어머니가 토로나에 감염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감염이 된지 3일 지난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인지 감염의 위험때문에 거작 5분의 비대면 만남만을 허용한 병원안에서 감염이 되었다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고령이신데다 면역력도 떨어진 몸상태인데다가 백신접종도 안 한 열악한 상황이기에 만약을 준비해야 된다고 하는 동생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격리병실로 간병사와 함께 계시다는 소식과 함께 지금은 잘 이겨내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치명률이 낮은 오미크론이 유행하고 있지만 워낙 취약한 몸상태이기에 안심을 할 수가 없어 마음이 타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할 정도로 어머니는 잘 버티시고 견뎌내셨습니다. 일주일간의 격리병실에서 코로나와 싸움에서 이겨 내시고 테스트후 음성판결을 받고 다시 일반 병실로 되돌아 가셨던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아쉬움이 진한 짧은 만남으로 속 상함을 어머니는 넉넉하게 이겨 내시며 자식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신 것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합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일하고 어머니와 영상통화로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식의 이름을 잊어 버리지만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