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CCM

신분을 뛰어넘는 섬김 2

onchris 2022. 4. 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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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이자익 목사 이야기

 



100년 전 이 땅은 희망을 잃어가는 듯했다. 서양 열강들의 침략과 일제에 의한 탄압으로 정국은 불안했다. 헐벗고 굶주리는 민중은 늘어만 갔고,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렀다. 그럼에도 이 땅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파란눈의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복음 때문이었다. 말씀은 사망을 이기고 억압된 마음을 풀어주는 밝은 빛이요, 자유였다. 복음은 희망의 땅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0∼11)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차, 봉건적 유교문화를 뛰어넘어 헌신과 섬김의 본을 보여준 주의 백성들이 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교회를 설립한 조덕삼(1867∼1919) 장로와 이자익(1879∼1958) 목사의 얘기다.

조 장로는 이 지역 용화마을의 유지였고, 이 목사는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머슴이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세웠을까.

1904년 봄,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1862∼1929) 선교사는 중간 지점인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그는 당시 사교(邪敎)의 고장이던 금산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그날도 용화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 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왔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화답했다. 유교 정신에 투철한 보수집안의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경남 남해도에서 태어난 이자익은 17세 때 조덕삼을 만났다. 6세 때 부모를 잃고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도를 떠나 걸어걸어 금산에까지 왔다. 첫눈에 이자익의 영특함을 알아본 조덕삼은 그를 마방의 마부로 일하도록 했다.

무학의 이자익은 고개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 했다.



조덕삼, 이자익이 함께 믿음을 키운 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했다.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종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투표 결과는 놀라웠다.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를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자익은 장로가 된 뒤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종을 장로로 섬겼을 뿐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다.

조덕삼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이 교회는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고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운데 휘장을 쳤다. ㄱ자 양쪽 선이 만나는 중간엔 목사가 서는 강단이 있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가 교회에 들러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저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금산교회는 1908년 부활절을 지내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금산교회는 전북문화재 136호다. 한국 전통 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한 것과 함께 이 교회는 더 큰 의미를 안고 있다. 바로 지주와 머슴의 이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자고 적극 나섰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정성으로 섬겼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으로 이름을 알렸다.

금산교회는 100년째 아름다운 신앙의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조덕삼의 아들이 2대째 금산교회 장로로 섬겼고, 그의 아들도 3대째 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바로 4선의 국회의원,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 장로다. 그는 한달에 한번 금산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린다.

조 장로는 "부친에게서 들은 조부는 성경적 삶을 사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시며 새벽마다 자식들을 깨워 과수원에서 일하도록 했고,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을 가르치셨다. 1919년 12월 돌아가시면서도 할아버지는 '예수를 잘 믿어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고, 찬송가 525장(주 믿은 형제들)을 4절까지 모두 부르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이자익 목사에 대해선 "부드러운 음성으로 쉽게 복음을 들려주신 분"이라고 떠올렸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여자석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조르륵' 강단을 지나 어머님께 가곤 했다"면서 "그럴 때면 이 목사님은 '세형아, 조용히 앉아 예배를 드려야지'라며 인자하게 타일렀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이자익 목사의 후손은 목회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고분자화학의 권위자인 이규완 장로가 손자다. 그는 2004년부터 중국 옌볜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동생 이규석 목사는 조부가 설립한 대전신학대를 졸업하고 장신대학원을 나와 청주 동막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이규석 목사는 "목회하면서 꼭 실천하는 게 있다"면서 "신앙의 두 어르신처럼 나 역시 겸손하고 섬김을 실천하는지, 청렴결백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지 날마다 나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한다"고 밝혔다.

금산교회는 매주 순례객들로 붐빈다. 담임 이인수 목사는 "한 주에 십여개 교회의 성도들이 찾곤 한다"며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금산교회의 모습과 함께 믿음의 선조들이 피워낸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는다"고 소개했다. 금산교회는 남녀,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 짓던 시대에 참된 소통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섬김과 평등, 인권 같은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 100년 전 믿음의 선조들은 말씀에 의지해 그같은 기적들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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